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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 Ⅰ(상)>> 칼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자본론>의 원제는 Das Kapital이다. 영어식 번역으로는 Capital인가? 1권은 1867년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 했고, 2권과 3권은 사후 엥겔스의 편집이라 한다. 칼마르크스나 <자본론>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무지한 무리들이 있다, 하지만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생물학에서 ‘세포’, 물리학에서 ‘원자’가 전문용어가 아니라, 상식처럼 쓰이고 있지만, 처음에는 엄밀한 과학적 용어이자 개념이었다. Kapital 은 소문자로 시작하지 않고 대문자로 시작한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한 해부학, 세포학, 원자론이라 하고 싶다. 지금이야 자본이나 자본주의란 용어가 상식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자본이나 자본주의란 용어나 개념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야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살아가는 것이 자연적 과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본주의 체제는 수많은 혁명과 저항의 역사이다. 혁명과 저항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거나 사라져갔다는 의미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기회와 모험이었으리라.
이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마트에 들렀는데 생수 한 묶음에 3,000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순간 저렴한 상품 가격에 놀랐다. 그리곤 든 생각은 물(생수)는 어쩌면 이 가격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수를 기계를 이용하여 퍼 올리고, 정수 과정을 거치고, 포장하고 , 배달하고 등, 이 상품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여러 번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 여러 번의 과정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니, 물이라는 자연적 재료에는 원가가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 이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상품이란? 가격이 붙여진 사물이다. 마을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 마시는 것은 가격을 지불하지 않지만, 같은 물인데 마트에서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이야 생수(물 상품)가 판매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물이 가격이 매겨져 상품으로 진열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충격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자본주의란 세상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놀라운 마술을 보여준다. ‘상품화’는 유형, 무형을 가리지 않는다.
김수행은 <자본론>을 다섯권으로 나누었다.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이다. 책 목차는 순서는 상품-교환과정- 상품유통-화폐- 자본으로 전환. 그런 후 잉여가치에 대한 장이 이어진다. 자본론의 시작은 상품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상품’인가? 이것은 생물학이 ‘세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수라는 단순하고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물이 상품이 되고, 자본으로 어떻게 전환하는지를 <자본론>에 근거하여 할 수 있는 한 추적해 보며 이 책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런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야만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이다. ‘생수’라는 상품에 대한 혹은 ‘상품’ 일반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운 읽기’을 위한 시도일 뿐이다. 사실은, 이렇게 할 계획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여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게으른 독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이미 창문을 통해 여명이 비치고 있다. 책 한 권 읽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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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제 1권 자본의 생성과정(상)>> 칼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역.비봉출판사
이 책은 2004년 7월 15일 제2개역판 4쇄 발행본이다. 오래전에 헌책방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그때 조금 안면을 익힌 주인이 좋은 책이 있다고 하여 고마워서 웃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매장 뒤편 창고에서 낡고 오래되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물때가 안고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우리 시대 칼마르크스와 <자본론>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집에 데리고 와서 먼지를 털고, 곰팡이를 닦아냈다. 그동안 늘 한 번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엄청난 분량에 질려 읽어보지 못했다. 몇 달에 걸쳐 일독을 하였다. 읽어보았다지만, 아는 바는 적다. 사실 내게는 수십 년 전에 구입해 놓은 이론과출판사 발행 자본론 한 질이 있긴 했다. 수십 년 동안 책꽂이에만 꽂혀 있었다. 글자 크기도 작고하여 엄두를 낼 수 없이 방치된 상태로 같이 늙어 갔다. 그렇게 한 번 읽은 후에 상당 기간 책장에 놓여 있었다. 책장을 볼 때마다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세심하게 읽어보기로 하였다. 단 1권 (상)만 읽기로 하였다. 일하는 곳 휴게소에서 아주 조금씩 읽었다. 그러다가 근 1년 이상이 지나서 귀향하였다. 작년인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자본론> 강좌가 모 대학에서 이어져 왔는데, 이제 강좌를 폐쇄하기로 하였다는 한다. 이제 한국에 있는 어떤 대학에서도 칼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없다. <자본론>의 부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이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경제학은 없고, 모든 경제학은 단 하나만 남을 모양이다. 이로써 세계에 대한 다른 대안도 꿈도 상상도 사라진 것은 아닐까. 가히 자본주의라는 일극 체제가 모든 것을 삼키고 만 것일까? 더 나은 사회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칼마르크스의 사유에 빚졌든가? 이 위대한 사상가가 사라진 듯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배회하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저자의 사유는 필연이 아닐까 싶다. <자본론>은 무오류의 경전이 아니다. 숱한 오류와 잘못도 있고, 비판받을 여지도 많다고 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왔다고 뉴턴의 발자취가 사라질 수도 없고, 잊힐 수도 없다. 칼마르크스는 늘 자신의 이론이 과학적 이론이라고 하였다. 과학은 늘 오류가 있고 회의의 대상이다. 그의 사상은 사라지고 잊힐 이론이 아니라, 어쩌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재해석되고, 오류가 지적되고 하면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다른 삶을 상상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가? 이 책을 읽다가 마트에 생수를 사러 갔다가, 우연찮게 상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수라는 상품을 가지고 <자본론>의 사유를 적용해 따라가 볼 생각이다. 상품 생수가 어떻게 자본이 되고, 그 자본은 어떻게 운동하는지 구체적으로 보면 좋을 듯도 하다. 자본론은 마치 생물학에서 세포, 물리학에서 원자나 물리법칙처럼 자본의 세포나 원자 혹은 법칙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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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나날의 마음>> 문광훈 지음. 한길사
이 책은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여백에는 “가장 일상적인 것은 지구의 무게를 지닌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글 귀가 인쇄되어 있다. 발터 벤야민을 몇 번 읽어보았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술을 잔뜩 먹고 거리를 걷다가 비로소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아케이드를 돌아다니면서 사소한 사물에 대해 썼는지. 골목을 헤매며 하찮은 일상품에 대해서 쓰게 되었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실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왜! 읽고 쓰는걸까? 한참을 하지 못했다. 생활은 매일 반복되고, 다른 특별한 일도 없다. 독서를 하고 몇 자 적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생활에 혹은 ‘일상’에 포로가 되어 옴싹달싹 못한다. 가끔 미식을 즐기고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고, 농담을 주고 받고,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책에 소개된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대사을 옮겨보면 “삶의 여생을 먹고 마시고 살찌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르고 이기적이어서, 신문을 읽고 날씨를 살피며 아내와 싸우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같은 생활의 연속이다. 이것이 나의 ‘일상적인 것’들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이하나 실가닥 같은 그리움은 물과 산이 막아도 끊어지지 않는다” (주방언)
그런 실가닥 같은 그리움도 있다. 일상의 바퀴 사이에서 그래서 묻고 또 묻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 선(좋은)한 삶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으려고 하여도 깊은 산속 샘에서 물이 솟듯 일어난다. 왜 이런 것을 물어야 하고 묻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책을 읽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읽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읽지 않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경제적 사정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름대로 여러 즐거움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책상에 여러 시간 앉아 읽는 즐거움만 못하고, 일회적 재미 이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책 일기가 나를 더 똑독한 사람으로 만들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똑똑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잘 먹고, 잘 자고 하는 일상적인 대화나 모임에서 밀려나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럼 책 읽기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고요하게 몇 시간 앉아 있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도시적 삶이란 끊임없이 움직임을 강요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은 긴장의 연속이고, 서로를 경쟁자로 대하는 생활에서는 모두가 외톨이가 되고, 그 외로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영상 매체에 눈을 고정하고, 입의 즐거움을 얻어 고단함을 잠시라도 달래기 위해 맛집을 기웃거리거나, 비정상의 일탈을 경험하기 위해 약물에 취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는 고요나 정적을 잃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멈춰서는 것이 쉬이 허락되지 않는 듯하다. 책 읽기는 나를 멈춰 세운다. 저자는 멈추다, 돌아보다, 잊다, 만들다 라고 하고 이를 반성적 구성과정이라고 한다. /멈추는 것을 안 후에야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된 후에야 고요하게 되며, 고요하게 된 후에야 편안해지고, 편안한 후에야 사려할 수 있게 되고, 사려한 후에야 얻게 된다.(대학). 사는 것이 허망하고 쓸데없다고 느끼며 회의하여 불안하고 그 불안을 덜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자고, 오래 사는 것이 오직 유일한 목적이라고 아무리 다짐하고, 내 자신에게 강요해도 그 어떤 그리움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을까. 책을 읽는 일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 되어야 할 듯도 하다.
문광훈은 ‘심미주의자 선언’이라는 저서가 있는 듯 하다. 나는 이 제목을 보고 마음 건강 따위, 등 흔하디 흔한 마음상품에 하나를 더 얹으려고 하는 구나 하여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에 사전을 찾아보니 심미적이란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마음 心이 아니라, 살필, 알다 審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심미주의자의 미학 에세이다. 좋고, 선하고, 아름다움은 비슷한 의미가 있다.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고 선하다. 좋은 삶은 아름다운 삶이기도 하다. 요즘 세태는 내가 느끼면 그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아름다운가 하고 질문하면 상대편은 매우 불쾌해 한다. 그냥 그의 대답은 내가 아름답게 느꼈어, 이것이 다다. 의사가 되기 위해 십수 년을 공부해야하고, 한 사람의 과학자를 기르기 위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고,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들기 위해 세상에 모든 부모는 20여 년을 복무하는데,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는 슬프다. 그들도 ’인문학‘을 익히고 배우는데, ’미‘에 대해 알기 위해 십수 년을 노력하는데, 그들에게 돌아 온 대답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의 충고는 필요없다 정도다. 한 인간이 아름답기 위해서 그는 늘 절제라고 공부하는데 세상은 그런 각고의 노력을 하나의 취향정도로만 사고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미학은 무엇일까? 소위 ’인문학‘은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수학은 어렵지만 해결책이 있는데, 인문학은 그런 해결책이 없다. 사유가 무한 반복된다. 변주를 울리면서, 그래서 읽기 싫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런 애매모호함이나 모순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 아닐까. 삶이란, 그런 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안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우리는 방황하며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그렇게 나를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나아가게 한다. 문광훈의 추천을 따라 저년 식사 후 매일 오상산천을 걷는다. 바흐의 영국모음곡만 매일 듣는다. 그만 서야겠다.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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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함수 이야기>> 송륜진 지음. 자음과모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써 놓은 문자가 삭제되었다. 무척 화가 난다. 삭제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실수나 어리석음은 더 선명해진다. 분명 한 두 가지라도 잘 한 일이 있을텐데 그것들은 모두 삭제 되었다.
오늘의 삼각함수 이야기는 푸리에가 들려준다. 총 8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일반각의 정의, 2장 삼각함수의 정의, 3장 삼각함수의 성질, 4장 sin함수의 그래프, 5장 cos함수의 그래프 6장 tan함수의 그래프, 7장 삼각방정식과 삼각부등식, 8장 삼각함수의 응용. 3장까지 겨우 읽고 남겨진 장은 숙제로 남겨둔다. 아직까지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를 수 있을 곳까지 갔다나, 힘이 부치면 다시 내려온다. 저 앞에 정상이 보일지언정 안 되는 것은 안된다. 매번 그렇지만 내가 수학을 공부하는 방식은 외우고 반복하고 문제를 푼다. 무슨 감상이나 느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외우고 반복하고 푸는 것이 딱딱해 보이지만, 거기에 수학의 매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매 번 이 글은 책의 내용을 다시 써보며 내 방식대로 이해해 보는 식이다. 외우고 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베끼고 베껴야 한다. 지루한 반복만이 살길이다. 살아가는 일도 또한 무한 반복이다. 그 지겨운 반복 속에 기쁨도 슬픔도 삶도 있다. 다른 도리가 없다.
푸리에는 “자연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수학적 발견의 가장 풍요로운 원천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연이란, 나무와 강물이 있는 자연이 아니라, 세계 혹은 객관적 질서를 의미하리라. 수학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적 호기심이 그 동력인 듯 하다. 저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경제, 과학, 현상 등 많은 부분에서 삼각함수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삼각함수란, 삼각과 함수의 합성어이다. 삼각이란, 각이 세 개 모여있는 삼각형의 각이다. 우선 각이란 평면상의 한 점 O에서 출발한 2개의 반직선을 선OA, 선OB라 할 때, 이들 반직선이 만드는 도형 AOB를 말한다. 각은 기호로 ∠AOB라 한다. 간단히 ∠O라고도 한다. 평면도형에서는 0도에서 360도까지의 각만으로 충분하다. 평면도형이란, 바닥에 놓인 종이 한 장이나,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할 때의 도형이다. 지구가 평면도형일 때는 360도면 모든 방향이나 각도를 잴 수 있었다는 의미 같다. 그러나 각을 이루는 회전 방향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한다. 회전을 하면 회전량이 따져야 한다. 한 바퀴가 360도 인데, 두 바퀴도 똑 같이 360도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개념이 필요로 한다. 일반각이란, 각에 대한 개념을 확장하여 회전량으로 생각한 개념이다. 반직선OX와 꼭짓점 O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반직선 OP가 있을 때, OX를 시초선, OP를 동경이라 한다. 동경(움직이는 반직선)이 회전하는 방향이 시계 방향과 반대 방향 두 가지다. 동경은 회전하고 방향도 두 가지다. 해서 동경 OP의 위치가 정해져도 몇 번 회전 했는지, 어느 방향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30도, 390도, 750도는 같은 위치지만 회전량은 다르다. 해서 30도는 360*0+30, 390도는 360*1+30, 750도는 360*2+30로 표기한다. 0,1,2는 회전 수, 30도는 위치를 나타낸다. 그럼 음의 방향은 360*(-1)+30으로 표기한다. 이것을 일반화 하면 일반각의 표기는 360*n+aₒ(n=0, n=±1, n=±2 ----)다. 그리고 일반각의 개념을 좌표평면 위에 놓으면 제1사분면 각, 제2사분면의 각, 제3사분면의 각, 제4분면의 각이라 위치 할 수도 있게 된다. 일반각과 좌표평면의 만남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응 ‘도’이다. 이는 육십분법이라 한다. 육십분법 말고 새로 사용할 수 있는 단위에 ‘라디안’이 있다. 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라디안을 사용하는 방법을 호도법이라 한다. 호도법이란, 반지름이 r인 원에서 반지름의 길이 r에 대한 호의 길이 s의 비로 나타낸다. 식으로 하면 s/r 즉 s;r 이다. r이 2, s가 2면 1라디안이다. r이 2,s가 1면 1/2라이안이다. 그럼 호의 길이가 반원의 둘레와 같다면, 중심각은 180도이다. 호의 길이는 s=1/2*2πr이다. 원둘레가 2πr이니 반원은 1/2를 곱한다. s=1/2*2πr=πr이다. s/r =πr/r=π라디안. 180도는 π라디안이다. 360도 이면 2π라디안. 호도법의 라디안과 육십분법의 도를 바꾸는 방법은 호도법으로는 π/180. 육십분법으로는 180/라 한다. 30도는 몇 라디안일까? 180;π라디안 =30;x라디안 180*x라디안=30*라디안. x=π/6라디안. 반대로 1라디안은 얼마? 180;π라디안=x;1라디안. x*π라디안=180*1. π가 3,14---이니 대입해 보면 x는 57.30이다. 약간 아리송하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멀쩡한 육십분법을 놔두고 호도법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이유가 뭘까. 호도법으로 만들기 위해 시초선, 동경, 사분위 각, 라디안 같은 개념들을 만들고 기존의 방식을 확장하거나 상상하고 새로 조합할까?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지금 각광받고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패턴을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하는 수학적 논리이자 절차’ 이후 호도법은 엄청난 일을 해낸다고 한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에서 보듯이 현대 사회의 많은 것들은 사실 수학적 기반 위에 건축되었을지 모른다. 우리의 사고 기능까지 수학적으로 계산되고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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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예술적 형상>> 에른스트 헤켈. 엄양선 옮김. 이정모 해설. 그림씨
무엇이든 써야 한다. 농부가 밭에 가듯, 어부가 그물을 짊어지고 바다로 가듯, 목수가 대패질을 하듯, 써야 한다. 하지만 매번 써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터로 가고, 어머니는 더 일찍 밥을 차려낸다. 봄에는 새싹이 움트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고, 가을엔 스스로 떨구고, 겨울에는 헐벗는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이 책은 대부분이 그림으로 채워졌다. 이정모의 해설이 몇 쪽 있고, 에른스트 헤켈의 서문이 두 장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판이다.유공충류, 섬모충류, 방사극충류, 불가사리류, 요각류 등 백 가지는 넘는다. 대부분 해양 식물이나, 충류들이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현미경이나 고효율 돋보기로나 볼 수 있는 생물들이다. 사진기가 없는 시절이었으니, 헤켈이 손으로 그린 도판이다. 헤켈의 미생물 그림은 아돌프 길치가 석판화로 제작하여 출판되었다. 일일이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 헤켈도 대단하고, 그것을 석판화로 제작한 길치에 대해 갈채를 보내고 싶다. 헤켈은 그림 솜씨가 매우 훌륭했고, 길치의 석판화도 아주 아름답고 정교하다.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벌써 퇴출되어 도서관 지하창고에 보관 중인 책을 끄집어 냈다. 생물학이나 해양 생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이정모의 해설을 인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정모는 헤켈,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다. 라고 썼다. 헤켈은 1834년 태어나서 1919년 사망했다. 1705년 증기기관, 1752년 피뢰침, 1774년 산소 발견, 1789년 프랑스 혁명, 1796년 천연두 백신 실용화, 1799년부터 1804년에 걸친 홈볼트의 아메리카 탐험,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출간. 등등. 18, 19세기에는 근대, 과학, 새로운 사회와 정치가 봇물처럼 터진 시기였다. 헤켈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생태학’이란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 ‘생태학이란 자연의 경제에 관한 지식체계다’ 현대 물리학의 태동 시기는 1890-1905년 사이라고 한다. 그 전에 생물학도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인간과 세계가 확장되고, 그만큼 그것들에 많은 관심이 쏠렸음을 직작할 수 잇다. 요즘은 AI, 로봇공학이나 하는 과학이 각광받는데, 당시에는 생명에 대한 연구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이정모는 해설을 하고나서 몇 번 이런 말을 덧붙인다.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홈볼트와 마찬가지로 헤켈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나 당연한 사실이 되기까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과학사는 혹은 사회는 그런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회의 하면서 제 길을 간다. 헤켈은 서문에서 쓰고 있다. “자연은 자신의 품 안에서 놀랄 만큼 멋진 형상들을 지칠 줄 모르고 만들어 낸다. 그 아름다움과 다양성은 인간이 만든 모든 예술 형태를 뛰어 넘는다”
헤켈의 책 제목은 <자연의 예술적 형상>이다. 자연, 예술, 형상이 담겨있다. 그는 “근대 조형 예술과 대단히 융성한 예술산업은 이 진정한 <자연의 예술적 형상>에서 더욱 새롭고 더욱 아름다운 모티브를 풍부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추상미술, 행위 예술이니 하는 예술 사조가 많아 형상화를 하는 조형 예술이 시들었지만, 당시에는 조형예술이 우위를 차지한 모양이다. 그림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자세히는 볼 능력이 못 되고, 몇 번 훑어 보았다. 잘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런 자질도 없고 노력도 없다. 그림 모두는 일종의 바다 미생물이다. 단세포 생물이고 가장 작고 단순한 생물들이다. 이들은 단지 생존만 하면 되지, 이렇게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과 형상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 진화의 기적이라고 게으르고 성급한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렇게 추론해 본다. 가장 단순한 생물부터 가장 복잡하고 큰 생물까지 모든 생물은 단지 생존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생존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생명이란 가장 아름다운 무엇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그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살아가는 것은 예술 활동 일 수 있겠다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저렇게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을 하는구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문양, 디자인, 장식, 예술적 형상이 여기에 다 있을 수가 있겠구나 싶다. 인간은 그 형상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취하여 예술적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에 모든 것이 있구나 싶다. 헤켈은 예술에 영감을 주고 싶었고,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대는 인간이 주인이고 생물계통계의 최고봉이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자연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고, 인간 생명의 토대가 자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생활이 인공적인 현대에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훈련된 안목과 오랫동안의 보는 능력에 대한 노력과 천재적인 자질이 없는 내가 이 책을 보고 가질 수 있는 관점이나 느낌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정도다. 언제쯤 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가. 아름다운 생물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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